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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안식처

편지

자유  2015. 8. 21. 23:20

7월 29일.


오늘도 비가 오락가락 날이 이러면 제작을 시작하고 싶지도 않고, 조반 후 지금 아이 시켜 중앙국에 편지 넣으러 보냈고, 방 안을 약간 정리하고 남녘 창 문지방에 책상을 놓고 지금 편지를 쓰오. 참 그 푸른 담배 잘 피웠소. 저번 편지에도 썼지만 한 갑은 이산, 한갑은 어머님, 두 갑은 내가 피웠지.


쓰다가 붓을 멈추고 마당을 내다보면 노랗고 빨갛고 또 무슨 빛깔의 꽃들이 우중에 피어 있소. 분꽃은 비가 오니 꽃 이파리를 딱딱 오므리고 고개를 숙이고들 있구만. 저번에는 우리가 가지를 쳤지만 이번에는 옆집에서 울타리 아카시아 가지를 쳐서 한결 훤칠해졌소. 가죽나무는 무성하게 가지가 오르더니 저번 비바람에 찢어진 가지도 있고 해서 약간 성글고 이럴 때 내 곁에 너 있으면 우죽 좋을까. 비 내리는 정원을 둘이서 내다보고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너, 내 파리에 가서 살아 보나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난 서울서 살고 싶지가 않아. 서울이 싫은 것이 아니라, 좋기는 하지만 그까짓 것들 다 버리고 전원으로 가고 싶어. 꽃 심고 푸성귀 뿌리고 짐승들과 새와 그렇게 하고 살고 싶어. 너는 찬성해 주겠지. 우리 둘이만을 위해서 우리들은 살고 싶고 노력하고 싶어. 이것이 나의 진실이야. 나는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야. 너도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고. 나 파리에 가면 그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지만 되도록이면 거기서 오래오래 아니 가능하다면 영주하고 싶어. 그러나 나 같은 마음 약한 예술가가 누구보다도 고국을 그리워할 거야. 허나 언젠가 불국사에서 느낀 것이지만,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그 쓸쓸한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없어. 허나 너와 더불어 있다면 난 가능할 것 같아. 같은 게 아니라 자신이 있어.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 애인과 조국은 분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것이 아닐까?


김환기 화백이 아내 향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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